6장

일곱 번째 박자

약 16분 · 8,656자

북쪽 고개를 넘자 땅의 색이 바뀌었다.

헤른의 안개와 초록이 끝나고 잿빛이 시작됐다. 북부 점령지. 마왕군이 먼저 차지한 땅. 들판은 불탔고, 마을은 비었고, 감시탑이 언덕마다 서 있었다. 하늘에는 와이번이 돌았다. 박쥐 날개에 뱀 꼬리. 그것들이 돌면 땅의 순찰대가 그쪽으로 움직였다. 네 사람은 와이번의 그림자를 피해 걸었다. 바위에서 바위로. 고원에서 배운 대로.

"흑갑은 마법을 흡수해." 걸으며 세드가 말했다. "그리고 깨진 틈을 바로 메워. 다렌은 갑옷을 깨뜨렸어. 그런데 붙는 틈을 못 넘었어."

"어떻게 넘어요." 에반이 물었다.

"모르겠어. 그런데 베르사의 요새에 같은 계열의 재생 갑옷을 시험하는 시설이 있어. 마왕성에서 들었어. 흑갑을 만든 게 베르사야."

"베르사가 누구예요."

"마녀. 원래 인간 마법사였어. 늙는 게 무서워서 마왕한테 붙었대."

"정보보다 구출이 먼저야." 미라가 말했다. 그녀는 새 방패를 어깨끈으로 메고 있었다. 왼팔은 가슴에 묶인 채. 걸음은 전과 같았다. "포로가 먼저. 갑옷은 그 다음."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끄덕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에는 갑옷이 먼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갑옷을 알면 마왕을 이길 수 있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끄덕였다. 끄덕이는 것이 먼저 나왔다. 생각은 그 다음에.

요새는 잿빛 들판 한가운데 있었다. 검은 돌로 쌓은 네모난 것. 창이 작았다. 굴뚝에서 보라색 연기가 올랐다. 감옥이자 공장. 포로를 가두고, 포로에게서 마력을 뽑아 병기를 만드는 곳. 에반은 그 연기를 보았다. 사람에게서 뽑은 것이 저렇게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요새까지 사흘이었다.

첫날 와이번이 왔다.

바위 사이를 지날 때였다. 그림자가 먼저 왔다. 땅 위로. 미라가 손을 들었다. 넷은 바위 밑에 엎드렸다. 와이번은 낮게 돌았다. 날개 소리. 가죽이 바람을 치는 소리. 그것은 넷을 보지 못했다. 보았다면 울었을 것이다. 울면 순찰대가 왔다. 와이번은 두 바퀴 돌고 북쪽으로 갔다.

"안 봤어요?" 에반이 속삭였다.

"봤으면 울었어." 미라가 말했다. "저건 눈이 나빠. 움직이는 것만 봐."

"어떻게 알아요?"

"수송대 할 때 배웠어. 세 번 당하고."

둘째 날 빈 마을에서 잤다.

마을은 비어 있었다. 사람이 없었다. 시체도 없었다. 끌려간 것이다. 집은 그대로였다. 문이 열린 채. 식탁에 그릇. 그릇에 마른 음식. 넷은 가장 안쪽 집에 들어갔다. 불은 피우지 않았다. 연기가 보였다.

노엘은 그 집의 아이 방을 보았다. 작은 침대. 나무 인형. 그녀는 오래 서 있었다. 미라가 옆에 왔다.

"……동생 방이 이랬어요."

미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르도가 요새에 있대요."

"그래."

"만나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몰라도 돼. 만나면 알겠지."

"모르면요?"

"그때는 내가 두 번 두드릴게." 미라가 말했다. "물러나라고. 그럼 물러나."

노엘은 미라를 보았다. 미라는 방패를 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끈을 조이며.

"내가 물러날까요?"

"모르지. 그런데 신호는 있는 게 나아. 없는 것보다."

노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금. 그리고 나무 인형을 집었다. 침대 위에 바로 놓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셋째 날 감시탑을 지났다.

돌로 쌓은 탑. 꼭대기에 병사 둘. 그 아래로 지나야 했다. 다른 길이 없었다. 미라가 탑을 보았다. 오래. 병사들이 어디를 보는지. 언제 돌아서는지. 그녀는 셌다. 병사 하나가 북쪽을 보고, 다른 하나가 남쪽을 보고, 둘이 교대하는 순간이 있었다. 열 박자마다.

"열 박자에 한 번 둘 다 안 봐. 그때 간다. 바위에서 바위로. 한 번에 한 사람."

세드가 먼저. 열 박자. 갔다. 노엘. 열 박자. 갔다. 에반. 열 박자. 갔다. 미라. 열 박자. 가다가 방패가 바위에 긁혔다. 소리. 병사가 돌아보았다. 넷은 엎드렸다. 병사는 한참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돌아섰다.

에반은 엎드린 채 미라를 보았다. 미라는 방패를 보았다. 한 손으로 드는 것은 됐다. 그러나 한 손으로 드는 방패는 몸에서 멀었다. 바위에 긁혔다. 두 손이면 안 긁혔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았다. 에반도 알았다. 둘 다 말하지 않았다.

요새가 보였을 때 세드가 말했다.

"하수구로 들어가. 뒤쪽. 베르사가 자랑하던 거야. 마왕성에서. 요새 물은 전부 한 구멍으로 나간다고. 그게 자랑이었어."

"자랑이 입구네요." 노엘이 말했다.

"자랑은 보통 그래."


들어가는 길은 하수구였다.

세드가 알았다. 마왕성에서 들은 것인지, 베르사에게서 들은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요새 뒤쪽, 들판으로 물이 빠지는 구멍. 쇠창살이 있었다. 미라가 받침으로 창살을 비틀었다. 한 손으로. 쇠가 휘었다. 넷은 그 틈으로 들어갔다. 물이 무릎까지 왔다. 냄새가 났다.

하수구 안은 소리가 울렸다.

물소리. 발소리. 숨소리. 넷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면 울렸다. 세드의 지팡이 불만 앞에서. 어두운 물. 무릎까지. 뭔가가 발목을 스쳤다. 에반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폐광의 해골 때처럼 지르지 않았다. 그때와 달랐다. 뒤에 미라가 있었고 앞에 세드가 있었다.

세드가 멈췄다. 갈림길. 그는 벽을 보았다. 표시가 없었다. 베르사의 자랑에 표시는 없었다. 그는 물의 흐름을 보았다. 어느 쪽에서 오는지. 요새 안쪽에서 오는 쪽. 그쪽으로.

에반이 그의 옆에 섰다. 작게 물었다. 울리지 않게.

"무서워요?"

"……응."

"저도요."

세드가 그를 보았다. 지팡이 불빛에. 에반은 앞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물을.

"늑대 때는 안 무섭다고 했잖아."

"거짓말이었어요."

"……알았어."

"당신도 거짓말했잖아요. 일곱 된다고."

"……그랬지."

둘은 다시 걸었다. 물을 헤치고. 뒤에서 미라가 둥, 하고 방패를 한 번 쳤다. 한 번. 약속에 없는 신호. 그냥 '가자'. 셋 다 그 뜻을 알았다. 아무도 정하지 않은 신호였는데 알았다.

하수구는 감방 구역 아래로 이어졌다. 돌바닥에 쇠창살 문. 그 위로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발소리. 쇠사슬 소리. 세드가 창살 문의 마법 자물쇠를 녹였다. 넷은 올라갔다.

감방 구역에서 그들은 장터에서 헤어진 포로 가족을 다시 만났다.

작은 장터의 여관에서 본 사람들. 넷이 극단이라고 거짓말했을 때 웃던 사람들. 그 뒤로 끌려온 것이다. 살아 있었다. 마력을 뽑혀 쇠약했지만, 살아 있었다. 아이가 에반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손을 드는 데 힘이 들어 보였다. 에반은 창살을 잡았다. 세드가 녹였다.

"저글링." 아이가 말했다. 세드를 보며. "저글링 아저씨."

세드는 잠깐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글링 아저씨."

감방은 많았다. 스무 개. 서른 개. 각각 대여섯 명. 넷은 감방을 하나씩 열어 안전한 중계 지점으로 사람을 모았다. 하수구 입구. 거기에 모아 두고 다음 감방으로. 노엘이 환자 상태를 보고 순서를 정했다. 이 사람 먼저, 이 사람은 업어야, 이 사람은 걸을 수 있음. 그녀는 사람 얼굴을 보고 그것을 알았다. 눈을 보고, 입술 색을 보고, 손을 잡아 보고.

미라는 걸을 수 있는 포로들에게 서로를 업는 방법을 가르쳤다. 무릎을 이렇게, 팔을 이렇게. 한 손으로 시범을 보였다. 포로들은 처음에는 지시만 받았다. 멍하니. 그러다 서로를 업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딸이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탈출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감옥 복도에서 서로를 업는 포로들과 환자를 살피는 노엘
서로를 업는 포로들

감방 하나에서 노인이 나오지 않았다.

문은 열렸다. 다른 사람들은 나갔다. 노인은 구석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안고. 노파. 눈을 감은. 숨이 아주 얕았다. 노엘이 들어갔다. 노파를 보았다. 손을 잡았다. 맥을. 그리고 노인을 보았다.

"……못 가요." 노엘이 말했다. 미라에게. "옮기면 가는 길에 돌아가세요."

"그럼."

"여기 두면 여기서 돌아가시고요."

미라는 감방 안을 보았다. 노인과 노파를.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두고 가시오. 나도 여기 있겠소."

"안 됩니다."

"내가 결정하는 거요. 기사 양반."

미라는 한참 서 있었다. 다 데려간다. 그녀는 수도원에서 그렇게 말했다. 방법을 찾아. 지금 방법이 없었다. 노엘이 없다고 했다. 노엘은 거짓말을 안 했다.

"……업으면 얼마나 가요." 미라가 노엘에게 물었다.

"한 시진. 어쩌면."

"하수구 출구까지 반 시진이야."

노엘이 미라를 보았다. 미라는 노인을 보았다.

"밖에서 돌아가시게 합시다. 하늘 보이는 데서. 여기 말고."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파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가 노파를 업었다. 한 팔로. 노엘이 받쳐 주었다. 노인이 뒤를 따랐다. 하수구 출구. 강둑. 하늘. 노파는 거기서 돌아갔다. 반 시진 뒤. 노인이 손을 잡은 채. 하늘을 보며. 노엘이 옆에 앉아 있었다. 끝까지. 미라는 서 있었다. 받침을 박고. 벽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쪽을 보며.

에반은 그것을 보았다. 멀리서. 다 데려간다는 것이 살려서 데려간다는 뜻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때 알았다.

에반은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미라가 다 하지 않는다. 미라는 가르친다. 다친 뒤로 그녀가 바뀐 것인지, 원래 그랬는데 자신이 못 본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돌다리에서 그녀는 혼자 다 했다. 부하에게 맡긴 것은 사람이 없어서였다. 지금은 사람이 있었다. 포로들이. 그녀는 그들에게 맡겼다.

"저게 지휘야." 세드가 옆에서 말했다. 작게.

"뭐가요."

"남이 하게 하는 거."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드와 말을 섞은 것이 며칠 만이었다. 세드도 그것을 알았다. 더 말하지 않았다.


재생 갑옷은 실험 구역에 있었다.

감방 구역 위층. 쇠문 너머. 넓은 방에 갑옷 여럿이 걸려 있었다. 사람 없는 갑옷. 검은 쇠. 수도원의 것과 닮았지만 새것이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그중 하나가 움직였다. 네 사람이 들어서자 벽에서 떨어져 나와 섰다. 검을 들었다.

수도원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에반이 베었다. 갑옷이 막았다. 다시 베었다. 틈. 세드가 정박. 재생이 멎었다. 틈이 벌어진 채 멈췄다. 에반은 칼날을 댔다. 됐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틈을 넓히려고 더 밀었다. 칼날을 비틀어서. 더 깊이.

접촉이 떨어졌다.

날이 미끄러졌다. 한순간. 그 한순간에 재생이 돌아왔다. 갑옷이 붙었다. 세드의 정박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소용없었다. 접촉이 끊긴 것이다. 에반은 물러났다. 갑옷의 검이 그가 있던 자리를 갈랐다.

"왜 떨어졌어." 미라가 물었다. 방패 뒤에서.

"더 벌리려고—"

"벌리는 게 아니야. 대는 거야."

에반은 그 말을 들었다. 수도원에서 노엘이 한 말과 같았다. 대고 유지. 그는 그것을 알았다. 아는데 손이 밀었다. 손목이. 더 세게. 더 깊이. 두 해 동안 허수아비를 그렇게 쳤던 손목이.

두 번째 시도. 에반이 베었다. 틈. 세드가 정박. 미라가 받침을 박고 고정 방패를 세웠다. 갑옷과 에반 사이에. 갑옷의 검이 방패를 쳤다. 미라가 흘렸다. 에반은 그 뒤에서 칼날을 댔다. 밀지 않았다. 그냥 댔다. 손목에 힘을 뺐다. 물동이를 들 때처럼. 한 호흡.

갑옷이 무너졌다.

"마왕은 가만히 서 있지 않을 거야." 세드가 말했다. 숨을 고르며. "이건 실험이야. 진짜는 움직여. 세게. 네가 대는 동안 계속 쳐."

"알아요."

"알아도 돼. 한 번 된 건 다시 될 수 있어."

에반은 세드를 보았다. 세드는 갑옷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갑옷을. 에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한 번은 됐다. 한 번 된 것은 다시 될 수 있다. 브란이 한 말과 같았다. 한 번 됐다고 된 게 아니야. 백 번. 그는 그 두 말을 함께 생각했다.


실험 구역 벽에 베르사의 기록이 있었다.

갑옷들이 걸린 방. 무너진 갑옷 옆. 벽에 석판이 박혀 있었고, 거기 글이 새겨져 있었다. 마법 문자. 세드가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횃불을 가까이 댔다. 읽었다. 천천히. 입술이 움직였다.

"뭐라고 써 있어요." 에반이 물었다.

"흑갑 설계. 재생 구조."

세드는 계속 읽었다. 그러다 멈췄다. 한 줄에서. 오래 보았다. 에반이 옆에 섰다. 읽을 수 없었다. 세드의 얼굴만 보았다.

"……'재생 정지가 일곱 박자를 넘기면 내부 결속이 노출된다. 다만 정지술을 일곱 박자 유지할 수 있는 술사는 왕국에 없다. 따라서 무결.'"

세드는 그 줄을 다시 읽었다. 소리 내지 않고. 그리고 횃불을 내렸다.

"……있었는데." 그가 말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미라가 받침을 뽑았다. 노엘이 약 상자를 닫았다. 에반은 세드를 보았다. 세드는 석판을 보고 있었다. 왕국에 없다. 베르사는 그렇게 썼다. 마왕성에서 다렌 옆에 있던 술사가 다섯에서 끊긴 것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무결이라고 썼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날은.

"일곱 되잖아요." 에반이 말했다. "연습에서는."

세드가 그를 보았다.

"……연습에서는."

"연습 아니라도 되게 하면 되잖아요."

"어떻게."

"뒤에 뭐가 올지 알면 된다면서요. 뒤에 제가 있을게요."

세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횃불이 흔들렸다. 그는 석판에서 눈을 뗐다. 에반을 보았다. 에반은 이미 돌아서서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실험실 쪽. 베르사가 있는 쪽.

"……그래." 세드가 말했다. 에반의 등에.

미라가 둥, 둥, 둥. 방패를 세 번 쳤다. 옆으로 한 걸음. 에반이 옆으로 갔다. 미라가 그 자리에 섰다. 문 앞에. 넷은 문을 열었다.


베르사는 실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실험 구역 안쪽. 유리병과 마법진이 가득한 방. 벽에 통신 수정이 박혀 있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마법사. 늙음과 죽음이 두려워 마왕에게 붙은 여자. 얼굴은 젊었다. 손은 늙어 있었다. 얼굴과 손이 맞지 않았다. 그녀는 세드를 알고 있었다. 세드가 무엇을 했는지도. 마왕성에서 세드가 달아난 그날, 그녀는 거기 없었다. 그러나 들었다. 마왕이 말했으니까. 비웃으며.

"너희는 저 남자에게 등을 맡기는구나." 그녀가 웃었다. "재미있겠어. 언제 또 달아날지."

"너는 그 자리에 없었어." 미라가 말했다.

"있을 필요가 있니? 결과는 같은데."

"그 말은 맞아." 세드가 말했다. "나는 달아났어. 그다음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몰라."

"네 덕에 다렌을 확실히 죽일 수 있었다고 하던데."

에반이 칼을 들었다. 손이 움직였다. 발이 움직이려 했다. 저 여자를. 저 입을.

둥, 둥.

미라의 방패 소리. 두 번. 에반은 멈췄다. 몸이 먼저 멈췄다. 머리는 그 다음에 따라왔다. 왜 멈추지. 그는 미라를 보았다. 미라는 베르사를 보고 있었다. 방패 뒤에서. 뭔가를 보고 있었다. 에반이 못 본 것을. 베르사 주위의 공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환영. 저기로 뛰어들면 안 됐다.

베르사는 그날 마왕성 퇴로에 없었다. 문이 닫힌 뒤 다렌이 몇 박자를 더 버텼는지, 세드가 버텼다면 달라졌을지 그녀는 몰랐다. 세드를 흔들기 위해 결과를 원인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세드는 그 말을 부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는 것만 말했다. 달아났다. 그 다음은 모른다. 그것이 그가 아는 전부였고, 그는 그 전부에서 한 발도 더 나가지 않았다. 덜 나쁜 쪽으로도, 더 나쁜 쪽으로도.

"그러면 지금도 현명해지렴." 베르사가 말했다. "저 애는 다렌보다 약하잖니."

"그래서 남아야 해."

세드는 앞으로 나섰다. 에반 앞으로. 미라 옆으로. 지팡이를 들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섰다.

에반은 그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검 끝을 아래로 낮추고, 미라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과 달랐다. 전에는 기다리지 않았다.

실험실의 베르사와 환영들, 앞으로 나선 세드와 검 끝을 내린 에반
그래서 남아야 해

환영이 동료와 겹쳤다.

베르사가 손을 들자 방이 흔들렸고, 미라가 둘, 노엘이 셋, 세드가 넷이 됐다. 같은 얼굴. 같은 옷. 같은 자리에서 조금씩 어긋나게. 어느 것이 진짜인지 눈으로는 알 수 없었다. 에반은 검을 들고 멈춰 섰다. 베려면 벨 수 있었다. 그러나 베면 누구를 베는지 몰랐다.

둥, 둥, 둥.

진짜 미라의 방패 소리. 소리는 환영이 못 냈다. 환영은 모양만이었다. 에반은 그쪽으로 옆걸음을 쳤다. 셋 중 하나. 소리가 난 쪽. 그는 그 미라 옆에 섰다. 진짜였다. 방패가 쇠였다.

"에반, 왼쪽!" 노엘의 목소리. 진짜 노엘은 이름을 불렀다. 환영은 부르지 않았다. 환영은 입만 움직였다. 소리가 없었다. 에반은 왼쪽을 보았다. 베르사의 환영 하나가 거기서 그를 치려 하고 있었다. 그는 흘렸다. 환영은 흘리면 사라졌다. 실체가 없으니까.

"세드!" 에반이 외쳤다.

"여기." 짧은 대답. 세드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환영은 길게 말했다. "이쪽이야, 에반, 나야, 여기—" 그것은 세드가 아니었다. 세드는 "여기"라고만 했다. 에반은 그 세드 뒤에 섰다. 등 뒤를. 진짜였다.

그들은 서로의 위치를 찾았다. 방패 소리로, 이름으로, 짧은 대답으로. 헤른에서 정한 약속으로. 베르사는 그 약속을 몰랐다. 환영은 모양을 흉내 낼 수 있었지만 약속은 흉내 낼 수 없었다. 넷이 한자리에 모였다. 환영은 그 주위에서 흩어졌다. 에반이 베었다. 환영은 베면 사라졌다. 열, 스물. 마지막에 베르사 하나가 남았다. 진짜.

노엘이 손을 들었다. 종소리. 베르사의 마력 집중이 깨졌다. 세드가 얼렸다. 발을. 에반이 들어갔다. 베르사가 손을 들었다. 늦었다. 성검이 그녀의 지팡이를 베었다. 지팡이가 둘로 갈라졌다. 베르사가 무릎을 꿇었다.

쓰러진 베르사는 통신 수정을 붙잡고 마왕을 불렀다. 벽의 수정. 기어가서. 늙은 손으로.

"폐하. 요새가—"

수정에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낮고, 지루한. 협곡에서 들은 그 목소리.

"실패한 요새는 필요 없다."

수정이 꺼졌다.

베르사는 수정을 보았다. 꺼진 수정을. 그리고 웃었다. 젊은 얼굴로. 늙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그녀는 바닥의 마법진에 손을 댔다. 요새 전체를 태우는 주문. 자기까지. 전부.

"저기! 바닥 문양!" 노엘이 외쳤다. 불길의 기점을 읽었다. 마법진의 한 점. 모든 선이 모이는 곳. "저거 끊어요!"

에반이 달려가 성검을 댔다. 그 점에. 한 호흡. 대고. 밀지 않고. 결속이 끊어졌다. 마법진의 선이 흩어졌다. 불은 났다. 그러나 요새 전체가 아니라 실험실 하나였다.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왔다. 베르사는 자기가 일으킨 불 속에 남았다. 웃으면서. 아무도 그녀를 끌어내지 않았다. 끌어낼 수 없었다. 그녀가 거부했다.

문이 닫혔다. 안에서 불이 탔다.


지하 수로의 출구에서 마법 수문이 닫히고 있었다.

요새의 물이 빠지는 큰 문. 하수구보다 큰 것. 포로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 베르사가 죽으며 걸어 놓은 것인지, 불이 마법을 건드린 것인지, 수문이 내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마지막 포로들이 아직 안에 있었다. 스무 명. 그리고 뒤에서 뼈 소리가 났다. 요새의 언데드. 베르사가 만들어 둔 것들. 주인이 죽자 풀려나 아무거나 쫓고 있었다.

미라는 바깥에서 사람을 받아 올렸다. 수문 밖. 강둑. 한 손으로. 노엘은 마지막 환자를 업고 나갔다. 세드는 수문 아래 섰다.

"정박."

수문이 멈췄다. 하나.

에반은 안쪽에서 추격하는 언데드를 막았다. 둘. 셋. 뼈들이 왔다. 그는 흘렸다. 베었다. 흘렸다. 포로들이 그의 옆을 지나 수문 밖으로 나갔다. 열. 열다섯.

마왕성의 퇴로와 같았다. 세드는 그것을 알았다. 문, 주문, 뒤에서 오는 것들. 앞에는 나가야 할 사람들. 자기는 문 아래. 그때도 이랬다. 똑같았다. 넷.

세드의 입가에 피가 비쳤다. 혀를 깨문 것이다.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엘이 보았다. 환자를 업은 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가야 했다.

세드 뒤로 해골 하나가 기어 나왔다.

물속에서. 수문 아래. 세드의 발치. 뼈 손이 물 밖으로 나왔다. 세드는 그것을 보았다. 숨을 삼켰다. 주문이 흔들렸다. 수문이 한 뼘 내려왔다. 손이 떨렸다. 발이. 그 발이. 열흘을 걸었던 발이. 뒤로 가고 싶어 하는 발이. 지금 뒤로 가면 수문이 떨어지고, 포로 다섯이 안에 남고, 에반이 안에 남는다. 그때처럼.

그때, 그는 달아나지 않았다. 에반을 불렀다.

"에반. 뒤에 하나."

"알아요."

"빨리."

"계속 세요."

"다섯."

에반이 마지막 언데드의 무기를 받아흘렸다. 옆으로. 녹슨 검이 그의 옆을 지나 물에 빠졌다. 그리고 돌아서서 세드 뒤의 해골을 벴다. 한 번에. 뼈가 물에 흩어졌다. 그는 다시 돌아섰다. 앞을 막았다. 세드는 그를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등 뒤가 비지 않을 것을 알았다. 헤른에서처럼.

"여섯."

마지막 포로가 나갔다. 미라가 바깥에서 손을 뻗었다. 에반이 수문을 통과했다. 세드를 지나서. 지나며 그의 어깨를 한 번 쳤다. 세게. 세드가 휘청했다. 그러나 주문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당신 차례야!"

"일곱."

주문을 마친 세드가 뛰어들었다. 수문 아래를. 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반과 미라가 그의 양팔을 잡아 끌어올렸다. 에반이 왼팔을, 미라가 오른손으로 오른팔을. 세드가 강둑으로 올라왔다. 수문이 떨어졌다. 그의 발뒤꿈치 뒤에서. 물이 튀었다.

닫히다 멈춘 수문 아래 선 세드와, 그 뒤의 해골을 베는 에반
일곱

세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토할 듯이 헛기침을 했다. 한참 동안. 어깨가 들썩였다. 에반은 그 옆에 서 있었다. 미라는 반대편에. 노엘이 다가왔다. 세드는 손을 들어 괜찮다고 했다. 괜찮지 않은 손짓이었다.

"하나도…… 안 괜찮더라."

"알아요." 에반이 말했다. "그래도 있었잖아요."

세드는 고개를 들었다. 에반을 보았다. 에반은 강을 보고 있었다.


에반은 고맙다고 말했다. 그날 밤에. 불 옆에서. 짧게. "고마워요." 세드는 "응"이라고 했다. 용서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세드도 묻지 않았다. 둘 다 그것이 아직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전과 달랐다. 고맙다는 말이 있었다.

그날 밤 세드는 다렌의 목걸이를 향해 사과하지 않았다. 에반의 목에 걸린 것을 보지 않았다. 대신 포로들에게 나눠 줄 물을 끓였다. 큰 솥에, 몇 번이고. 강에서 길어서, 불에 올리고, 식혀서, 나눠 주고, 다시 길어서. 포로 쉰 명. 물 쉰 잔. 그는 그것을 혼자 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에반은 멀리서 그것을 보았다. 과거의 일 대신 지금의 일을 하는 사람을. 오래 보았다. 세드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물만 끓였다.

밤, 큰 솥에 물을 끓이는 세드와 멀리서 보는 에반
물을 끓이는 사람

노엘이 에반 옆에 앉았다.

"뭘 그렇게 봐요."

"……모르겠어요."

"저 사람, 저글링할 때랑 얼굴이 달라요."

"어떻게요."

"그때는 뭘 잊으려고 웃었는데." 노엘이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에반은 그 말을 생각했다. 오래. 노엘은 더 말하지 않고 환자들에게 갔다.

수로 출구에는 요새의 보급용 강배가 묶여 있었다. 바닥이 평평한 큰 배. 요새로 물자를 나르던 것. 미라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타고 간다. 큰 강을 따라. 왕도까지." 포로들을 태웠다. 쉰 명. 배는 꽉 찼다. 세드가 배를 몰 줄 알았다. 강배는 몰 것이 별로 없었다. 흐름을 타면 됐다.

요새에서 가져온 지도에는 왕도 공격 계획이 그려져 있었다. 베르사의 방에서 찾은 것. 날짜가 있었다. 가까웠다. 열흘. 강을 타고 내려가면 닷새.

배가 떠났다. 잿빛 들판이 뒤로 멀어졌다. 요새의 굴뚝에서 보라색 연기가 더는 오르지 않았다. 검은 연기가 올랐다. 베르사의 실험실이 타는 연기. 에반은 그것을 보았다. 배의 고물에서. 그리고 돌아섰다. 앞을 보았다. 강이 남쪽으로 흘렀다. 왕도 쪽으로.

미라가 옆에 섰다. 방패를 내려놓고.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받침." 그녀가 말했다.

"네?"

"받침, 무거웠지. 짐에."

"……괜찮았어요."

"대장간에서 네가 두드린 거더라. 헤른 대장장이가 말해 줬어."

에반은 강을 보았다.

"……네."

미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둥, 둥. 난간을 두 번 두드렸다. 그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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